천상열차분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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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하면 우리는 만주벌판에 서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떠 올리지만,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석이 서울 한복판 국립고궁박물관 과학실에도 우뚝 서 있다.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고구려 시대 평양에서 각석한 천문도(‘평양 성도(星圖)’)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돌에 새긴 천문도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가 바로 그것이다(태조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가운데 하나로써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유산이며, 세계적인 보물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하늘의 모습 ‘천상’을 ‘차’와 ‘분야’에 따라 벌려놓은 ‘그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차’란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열두 구역을 말하고, ‘분야’란 하늘의 별자리 구역을 열둘로 나눠 지상의 해당지역과 대응 시킨 것을 뜻한다. 이 비석의 뒷면에도 전면과 똑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지만 일부 내용의 배치가 바뀌고 세련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세종 15년에 복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세종본). 이 비석이 마모되자 숙종 13년(1687)에 원형보존을 위해 상태가 좋은 탁본을 바탕으로 이민철(李敏哲, 1669년 현종 10년에 수력식 혼천의 제작)이 새로 복각하였다(숙종본). 영조 46년(1770)에는 관상감 안에 흠경각을 지어 이 두 개의 비석을 함께 보존하여 왔다. 1908년에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으로 옮겨져 창경궁 명정전에 70년대 초까지 보관되어 왔다. 지금은 두 개의 비석을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들 비석의 내용을 필사하거나 목각하여 인쇄본이나 탁본을 제작하여 집권층이나 사대부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문도가 걸린 사랑방은 왕조의 건국이념과 정체성을 홍보하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천문도 비석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것을 판독하여 1913년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당시 평양의 합성숭실대학 교수 칼 루퍼스(Carl W. Rufus)였다. 중요한 내용을 영어와 한자로 논문에 옮겨 적어 서양의 학자들도 볼 수 있게 하였으며, 훗날 영국의 과학사가 니덤(Joseph Needham) 등이 한국 천문도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 안에 작은 원, 그리고 그 사이에 적도와 황도가 그려져 있다(필사본 참조). H 안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1,467개의 별들을 밝기에 따라 크고 작은 점으로 구분하고, 각 별자리의 이름을 해당 위치에 표시하였다(필사본 참조). 바깥 원의 주위에는 28수(二十八宿: 모든 별자리를 북극성을 중심으로 28개 구역으로 나눈 별자리)의 이름을 차례로 적고, 바깥 원과 작은 원 사이의 공간을 이 28수로 나눠 모든 별자리의 도수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H의 상단 중앙에는 두 개의 크고 작은 원(G) 안에 중성기(中星記, 24절기의 황혼과 새벽에 자오선을 지나는 별자리 기록)가 새겨져 있다. G의 좌우와 H의 사방에는 12개의 네모 칸에 천체와 상수에 대한 도설이 새겨져 있다. 태조본은 중앙원(숙종본의 H)에서 46cm 하단은 3단으로 첫째 단에 “圖之野分次列象天”라고 새긴 이름, 둘째 단(숙종본의 I와 J)에 각각 논천(우주론)과 28수의 거극분도(적위赤緯, 곧 천구상의 별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지도에서 북쪽 또는 남쪽으로 재어나간 각거리 角距離), 맨 아랫단(숙종본의 K와 L)에 각각 이 천문도의 역사적 배경과 제작에 참가한 12명의 관직과 성명이, 끝에는 제작연월이 홍무 28년 12월로 기록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노인이 고구려 천문도라는 탁본을 올렸다. 천문도를 새긴 비석은 평양에 있었는데 전란 중에 대동강에 빠뜨려 잃어버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인본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당시 태조는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는 받았지만 아직 국왕으로서 책봉되지 못한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지내던 터에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만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징표가 손 안에 들어 온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하루 속히 만천하에 알리고 제도를 개혁하고 싶어(이를 수명개제[受命改制]라 한다.) 주옥 같은 천문도를 서운관에 보내 돌에 다시 새기도록 하였다.
막상 돌에 새기려다 보니 고구려 천문도가 만들어진 이후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별자리가 이동하여 시간측정의 기준이 되는 중성기가 어긋났다. 서운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추산(천문계산)을 담당했던 유방택(柳方澤)과 물시계 관리자(掌漏)인 전윤(田潤)과 김자수(金自綏) 등은 한양의 자오선에 맞춰 중성(이십팔수 가운데 해가 질 때와 돋을 때에 하늘의 정남쪽에 보이는 별. 혼중성, 효중성을 말함)을 추산하여 중성기를 개수하였다. 고구려 당시 평양의 하늘을 지났던 중성기가 한양의 중성기로 바꾸었다(이것에 따라 1398년 물시계인 경루(更漏)를 제작하고 새벽과 황혼을 알리는 대종(晨昏大鐘)을 종루에 걸고 표준시각을 알렸다.) 개수가 끝나자 권근(權近)은 천문도 탁본의 유래, 중성기의 개수, 관상수시의 중요성, 조선왕조의 개창과 경천근민의 실천 등이 담긴 천문도지(天文圖誌)를 짓고, 설경수(偰慶壽)가 글씨를 썼다.
칼 루퍼스의 판독 이후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내용 대부분이 해독되었지만, 고구려 천문도 비석의 제작연대 그리고 태조 각석에 고구려 성도가 그대로 반영되었는지 또는 개작되었는지 여러 모로 연구가 되어왔다. 최근 한, 중 천문학사 연구에 따르면 평양 성도 비석이 6세기 후반 수나라 문제때 유계재(庾季才)가 만든 개도(蓋圖)의 영향을 받아 7세기 중반 이후인 고구려 보장왕 때 각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현대 천문학을 활용한 성도 연대분석에서는 중심부인 자미원의 별자리는 14세기 말, 주변부 별자리는 기원전후의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태조본 성도의 중심부는 조선 서운관에서 추산한 별자리들로, 주변부는 고구려 일관들이 추산한 별자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성도는 700여년을 사이에 둔 고구려와 조선 천문학자들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중성기는 조선 초에 사용된 수시력(授時曆)의 계산법을 활용하여 새로 추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천문도비는 고분에 별자리를 그린 고구려인의 천문 전통, 평양 첨성대에서 우러러 본 별자리, 중국과의 교류로 얻은 천문지식, 광개토대왕비를 새긴 솜씨 등이 합쳐진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의 성도를 수당(隋唐)시기 것으로 보아 중국의 천문도 역사를 보완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1)평양 성도는 전천 천문도 제작의 신기원으로 동아시아 천문도 제작의 전통을 수립한 고구려 일관들의 개가이다. 이것이 정확히 어제 만들어 졌는지는 대동강에 빠져있는 비석만이 말해줄 수 있으리라. 하루 속히 건져 올리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천문도 비석은 조선왕조 건국이념이 왕도정치의 구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정치적 상징물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과학적 창의성이 담겨 있는 과학문화유산이다. 무엇보다 그 속에 내포된 과학사상은 500여년을 두고 면면히 이어져 전근대 동아시아 천문과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천문도 비석을 보고 “사계절 원기(元氣) 잘 맞추면 태평성대 이루리니”라고 읊은 시인 장유(張維)의 노래는 우주항공 시대와 기후온난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 날에도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일찍이 천시(天時)를 중시한 선조들의 과학사상이 그렇게 높고 깊었음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서 다시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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