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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인물형토기 withe 동복

한스타일 | 2015.07.29 22:27 | 조회 1472 | 추천 0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2&contents_id=8741&leafId=92


기마인물형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문화재 국보 91호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는<br>사실적인 묘사로 신라인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국보 91호 기마인물형토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문화재이다. 1924년 발굴될 때에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지금도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관람객의 사랑을 받는다. 주인과 하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각각 말을 탄 모습으로, 말 탄 사람의 의복과 각종 말갖춤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신라인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제 91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떻게 발굴했을까?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에서 발굴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5월 30일이었다. 금령총은 6세기초,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쯤의 신라 무덤이다. 금령총 주변에는 신라의 초대형 무덤이 모여 있다. 금령총의 북쪽에 약 15m 떨어져서 단일 무덤으로는 신라의 가장 큰 무덤인 봉황대가 있고, 서쪽에는 금관총, 서봉총, 남쪽에는 황남대총, 천마총이 있다. 금관이 최초로 발견된 금관총은 금령총과 불과 50여 미터 떨어져 있다. 1920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견되었을당시 언론은‘동양의 투탄카멘’이라고 특필하였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금관총은 집을 짓던 중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무덤의 형태나 금관이 어떻게 출토되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일제의 고고학자는 조선총독부 총독을 설득해서 남아 있는 무덤 중에 봉분이 일부 훼손된 두 무덤을 발굴하게 된다. 이 무덤이 금령총과 식리총이었다. 결국 금관총에 이어 두 번째로 금관이 출토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금령총은 지하에 덧널[]을 만들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두껍게 덮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덧널 안에는 시신을 안치한 널[]을 머리를 동쪽에 오도록 넣고, 시신 동쪽에 부장품을 넣은 작은 상자를 매장하였다. 기마인물형토기는 부장품을 넣은 상자 속에서 발굴되었다.

무덤 주인은 어린 왕자일까?

묻힌 사람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금 귀걸이와 허리띠를 했으며 허리에는 칼을 찼다. 유물이 화려해서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가는고리 귀걸이와 칼을 찼으니 남자이다. 특이한 점은 금령총의 허리띠 길이가 다른 것과 달리 무척 짧다는 것이다. 금관도 다른 금관에 비해 작아서 무덤 주인은 어린아이로 추정된다. 어쩌면 무덤 주인은 어려서 죽은 왕자일지도 모르겠다.

왜 만들었을까?

기마인물형토기는 말을 탄 사람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숨은 기능이 있다. 말 등에는 깔때기처럼 생긴 구멍이 있어 액체를 넣고, 말 가슴에는 대롱이 있어 액체를 따를 수 있다. 말 내부는 비어 있어 240cc 정도를 담을 수 있다. 이 토기는 신라 왕실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 데 쓰던 주자()였다.

술이나 물을 따르는 데 쓰던 주자(). 말등에는 깔때기가 붙어있다.

복제품. 이렇게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사람들은 이처럼 말을 이용한 독창적 디자인의 주자()를 만들었는데, 왜 ‘말[]’을 디자인에 응용했을까. 이는 말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신라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옛 무덤에서는 말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된다. 천마총의 천마도를 비롯하여, 말 모양의 신라 토우나 토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토기와 함께 하인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기마인물형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손에 방울을 들었다. 앞장서서 하늘로 주인을 안내하는 듯하다. 실제로 발견 당시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여 있었다.

하늘로 주인을 안내하는 듯,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인 채로발견되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기마인물형토기의 X-ray 사진이다. 말 내부가 비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이 사진을 유심히 보면 이 토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먼저 몸통의 아래쪽, 다리가 붙은 부분을 보자. 다리를 붙일 때는 힘을 줘서 눌러야 한다. 그러면 몸통이 비어있으므로 이 부분이 몸통 안쪽으로 약간 튀어나오는 것이 정상인데, X-ray 사진에는 튀어나온 부분이 없고 매끈하다. 이것은 다리를 붙일 때 안쪽에 단단한 물건을 넣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마 나무를 원통모양으로 적당히 깎아 안에 넣고 성형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 나무는 어떻게 제거했을까? 말 엉덩이 쪽을 보면 손가락으로 잡아서 오므린 것과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마지막에 말 엉덩이 쪽으로 나무를 빼내고 엉덩이를 다시 봉합한 것이다.

기마인물형토기의 X-ray 사진

무엇을 알 수 있나?

이제 마지막으로 세부 사진을 보면서 기마인물형토기로 무엇을 알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자.

먼저 말 탄 사람이다.

턱 밑에 수염처럼 보이는 것은 모자를 묶은 끈이다. 콧대도 무척 높다.

바지 모양은 갑옷과 비슷하다.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칼일까?

뒷모습도 보자. 윗도리는 무엇을 입었을까?

발걸이도 있다. 가죽으로 만들었나 보다. 신발 끝은 버선코 같다.

다음은 말과 말갖춤이다.

뿔처럼 생긴 것이 있다. 사실은 갈기를 묶어 올린 것이다. 말방울도 보인다.

웃는 모습이 귀엽다. 입에 재갈을 물었다.

말안장은 앞판을 세모꼴로 장식했다. 띠고리도 보인다.

말띠드리개와 말다래도 있다. 천마도가 바로 이 말다래에 그린 것이다.

함께 출토된 하인상이다.

주인상과 나란히 발견된 하인상. 손에 방울을 들었다.

관련링크 : 네이버뮤지엄에서 '기마인물형토기' 전시 보러가기 

윤상덕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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