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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트인(부리야트인)

한스타일 | 2015.07.31 10:05 | 조회 3278 | 추천 1

부랴트인 영원한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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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연방, 몽골, 중국 내의 부랴트인 거주지역 ①부랴트 공화국 ②우스트 오르다 부랴트 자치구(2008년 1월 이르쿠츠크 주()로 통합) ③아가 부랴트 자치구(2008년 3월 자바이칼 지방으로 통합) ④세네헨 지역 <출처: http://khamagmongol.com/>            

‘늑대의 민족’이라 불렸으며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민족들 중 하나이고 아직도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바로 부랴트인이다. 부랴트인은 러시아, 몽골, 중국이 접하는 지역에 주로 거주한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V. A. 랴자놉스키가 『몽골법』(Молгольское право, 1931)에서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바이칼 지역에 사는 부랴트 종족들이 칭기즈칸에 복속되었다.”는 12세기 말 연대기의 기록이 역사상 부랴트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부랴트’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그 중에서 터키어의 '부리'(늑대) 또는 '부리-아타'(늑대-아버지)에서 나왔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부랴트인은 알타이어족() 몽골어군()의 부랴트어를 사용한다. 방언은 15개 정도이다. 지역별, 부족별로 크게 에히리트-불라가트, 알라르-툰카, 호리, 총골-사르툴 등으로 나누어진다. 부랴트인은 처음에 위구르 문자를, 이후 라틴어 문자(1931)와 러시아어 알파벳(1939)을 차용하였다. 현대 부랴트 표준어는 호리 방언을 기반으로 제정되었다.

부랴트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부랴트 공화국은 13세기에는 몽골에 속했다가 19세기에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몽골·부랴트자치주(1921), 몽골·부랴트자치공화국(1923), 부랴트자치공화국(1958)을 거쳐 1991년 3월 27일 지금의 부랴트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바이칼 호수 - ‘시베리아의 푸른 눈’이자 ‘러시아의 갈라파고스’    

“믿는 벗 N형!
나는 바이칼 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오. (중략) 부랴트족인 주인 노파는 벌써 잠이 들고 석유 등잔의 불이 가끔 창틈으로 들이쏘는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소. 우루루탕 하고 달빛을 실은 바이칼의 물결이 바로 이 어촌 앞의 바위를 때리고 있소.”     - 이광수의 『유정』 중 최석의 편지글

부랴트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빼놓을 수 없다. 인용문은 춘원 이광수의 『유정』이 시작하는 대목으로 죽은 친구 딸 남정임과의 플라토닉 러브로 괴로워하던 최석이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 떠나가서 친구에게 쓴 편지 중 일부이다.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작가들의 관심을 비껴가지 않은 바이칼 호수의 모습이 새삼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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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인 올혼 섬 ‘샤먼 바위(부르한 봉() 또는 동굴 봉)’의 모습 <출처: http://olkhon-myst.ru/>    

바이칼은 부랴트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이다. 하지만 양민종 교수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한다.

‘풍요로운 호수’이건, ‘무속의 호수’이건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 희귀 동·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오물(omul,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과 같은 고유종이다.

바이칼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올혼 섬이다. 올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상징도 흰독수리로 동일하기에 바이칼 호수의 작은 복사본으로 여겨진다. 올혼 섬의 ‘샤만 바위’(‘돌 사원’, ‘부르한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아시아의 9대 성소()들 중 하나이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그 안에서 샤만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상’이 놓여 있다.

    

1.5미터 정도 높이의 ‘샤만의 돌’ <출처: www.ozerobaikal.com>    

바이칼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의 돌’을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다 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커다란 바윗돌을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바로 ‘샤만의 돌’이라 불리는 두 개의 커다란 돌이다. 앙가라의 수원()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이다.

이 전설에는 또 다른 이설도 존재한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피웠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뒤쫓으라고 조카 이르쿠트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히 여겨서 길을 돌렸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수많은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뿐이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래서 이런 전설이 생겨난 듯하다.

바이칼 끝을
        배로 떠가는데,
저녁이 어스레하게 비쳤네.
“정말로 과학은 바이칼의 비스듬한 시선에 대해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바이칼을 파멸시킨
        역사 속에 있게 될 것인가?”     -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위의 시는 20세기 러시아 최고의 시인 보즈네센스키가 사람들에 의해 바이칼 호수가 더럽혀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쓴 시이다. 이 시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 창고’,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으로 불리며 2500만년을 깨끗하게 살아온 바이칼을 오염시키는 역사 속에 우리가 있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다.

부랴트인의 구비전승과 신화    

                  

                        부랴트공화국에 있는 게세르 동상 <출처: 아시아스토리백과>    

부랴트인은 신화, 대서사시, 샤만의 이야기, 전설, 민담, 격언, 속담, 수수께끼 등 여러 장르를 빌어 폭넓은 구비전승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대서사시 『울리게르』를 필두로 수많은 서사시들이 눈이 띤다. '게세르' 영웅 서사시는 몽골, 중국, 티베트 등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게세르는 영웅 서사시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서사시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바이칼의 게세르 신화』에 따르면 게세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채록된 판본들만 백여 개에 달하며 티베트와 몽골 고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다.

게세르 모티프를 가진 이야기들은 발견되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서로 상이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사는 부랴트인들은 순수한 샤머니즘 신화의 얼개를 가진 <게세르 신화> 혹은 <아바이 게세르 신화>를 구비 전승해오고 있다. 게세르 신화는 우리의 <단군신화>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어서 육당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단군 신화의 해명을 위해 동아시아 고대 신화와 서사시를 비교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부랴트인의 설화 중에는 내용 면에서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와 유사한 「용사와 백조 아내」설화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종교와 신앙    

    

                        구시노오죠르스크 사원의 1890년대 모습 <출처: wikipedia.org>    

부랴트인의 신앙을 단 한 마디로 압축하면 표현하면, ‘복합적’이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부랴트 공화국의 종교분포는 라마교 70%, 샤머니즘 18%, 러시아정교 1.4%, 개신교 0.2%이다. 샤머니즘과 텐그리(하늘)숭배 등의 정통적인 샤머니즘 신앙을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이고 러시아정교가 유입되면서 부랴트인들의 신앙체계는 복합적 성격을 띤다. 여기에 최근 개신교가 활발히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부랴트인들 사이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원시불교의 성격이 짙은 티베트불교가 폭넓게 지지를 받았다. 1741년 불교는 러시아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구시노오죠르스크 사원’이 세워진 것을 계기로 라마교의 세는 더욱 확산된다. 1914년 조사에 따르면, 부랴트 공화국 내에는 48개의 사원과 16,000명의 라마승들이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말 무렵에 이르러 부랴트 불교사원은 사라졌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부랴트 공화국에서 불교가 부활되기 시작했다. 부랴트 정신과 민족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샤머니즘 및 불교의 부흥과 맞물리고 있다.

유르트 - 3000년 유목생활을 지탱해준 주거형태    

    

                        유르트를 설치하고 있는 부랴트인 <출처: http://minkultrb.ru>    

부랴트어로 펠트 유르트는 ‘헤에이 게르’, 목재 유르트는 ‘모돈 게르’라고 한다. 유르트는 가벼울 뿐만 아니라 조립이 간편하다. 무겁지 않아서 말이나 소로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 유목생활에 적합하다. 벽은 접이식 목재 격자로 되어 있어 줄이거나 늘릴 수 있고 이동할 때 접었다 펴기도 용이하다. 벽은 경첩 구조를 하고 있어서 지진에도 끄떡없다. 지붕은 유연한 재질인 자작나무를 이용하여 원형으로 만든다. 원형 테두리에는 구멍이 보통 60개 정도 뚫려 있고 여기에 장대를 꽂아 벽에 고정한다. 지붕의 원형 테두리를 통해서 안으로 빛이 들어왔고 밧줄을 사용하여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것은 굴뚝의 기능도 겸했다.

3미터 정도 되는 펠트 천으로 유르트의 외부를 씌웠다.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연초와 소금을 넣은 삭힌 우유에 천을 담갔다가 잘 건조시켜서 사용하였다.

                  

유르트 내부 모습 <출처: vitkomplect.by>    

유르트 내부는 누가 어느 자리에 앉을지, 침대는 어디에 놓을지, 어떤 물건을 어디에 놓을지 확실히 정해져 있다. 북서쪽은 신이 머무는 장소로 집안의 제단이 위치했다. 전통적으로 서쪽, 즉 입구에서 왼쪽은 남성의 자리이고 반대편은 여성의 자리로 여겨진다.

유르트 안에서 볼 때 오른쪽은 상석이다. 그래서 남자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며느리는 절대 오른쪽으로 다닐 수 없다(딸은 무방하다). 며느리는 다른 종족의 상징인 왼쪽과 연관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왼쪽은 전통적으로 저세상을 의미했다. 누군가에게, 특히 연장자에게 왼손으로 차를 건네는 것은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최고의 모욕이다.

오른쪽에는 마구, 사냥 도구 등 남성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관하였다. 북쪽이 상석으로 간주된 반면 문과 접한 남쪽 공간은 가장 ‘낮은’ 부분이었다. 손님을 맞을 때도 나이와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자리를 구분해서 더 나이 많고 신분이 높은 사람은 상석에, 젊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은 문가의 ‘낮은’ 자리에 앉았다.

    

유르트를 실은 황소 수레의 모습 <출처: www.syl.ru>    

부랴트 의복 – 조끼로 기혼여성임을 표시    

부랴트인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옷을 만들어 입었다.

전통 남성의상은 겨울용 상의인 ‘데겔’과 여름용 상의인 ‘테를리크’로 나뉜다. 겨울 의상에는 주로 양가죽을, 일상적 데겔에는 목면을, 의례용으로는 비단이나 비로드를 사용하였다.

남성들은 가슴에 장식을 단 푸른색을 즐겨 입었다. 남성의 허리띠는 모양도 다양하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데겔은 길이가 길어서 걸어 다닐 때나 말을 탈 때도 다리가 추위에 드러나는 것을 막아주었다. 품도 깊어서 잔을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바로 자기 잔을 꺼내 차나 뜨거운 스프를 마실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의상은 말을 타고 다니는 생활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비상용 모포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깔고 덮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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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qazyx.wink.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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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club.osinka.ru>

여성의 의상은 긴 옷과 조끼로 이루어지는데, 나이에 따라 그리고 사회와 가정에서의 위치변화에 따라 다르게 입는다. 처녀는 테를리크나 데겔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매서 가늘고 날씬한 허리를 강조했다. 예복으로는 비단실로 만든 허리띠를 맸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처녀들은 조끼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중년 여인은 모양과 장식이 단순한 옷을 입는다. 일상복은 값이 저렴하고 색이 짙다. 기혼여성은 반드시 ‘우우자’(уужа)라 불리는 조끼를 입는다.

우우자는 긴 것과 짧은 것 두 형태가 있다. 짧은 조끼는 허리쯤에서 끝난다. 이는 남자, 특히 시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 여자는 머리와 등을 감싸야 한다는 고대 부랴트인의 관습과 연관된다. 긴 우우자는 바이칼 근처에 사는 부랴트인들이 즐겨 입었다. 주로 짧은 우우자에 뒤가 트인 긴 치마를 붙여서 만들었다.

조끼와 연관해서는 재밌는 사실들이 많은데, 칭기즈칸의 통치 시기에는 국가가 옷과 색깔을 법으로 정했다. 사용하는 천, 마름기술, 천의 색깔에 따라 그가 어떤 사회계층에 속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부랴트인의 전통음식 - 고기와 유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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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프(부랴트 국수) <출처: surfingbird.ru>            

마늘과 당근, 집에서 만든 마카로니를 넣어 버터에 요리한 말고기 요리 <출처: http://ru-travel.livejournal.com>            

유목생활은 엄청난 에너지 소비를 요구한다. 그래서 부랴트인의 전통음식은 높은 열량을 자랑한다. 예부터 가축을 길렀으므로 고기와 유제품으로 주식을 만들었다. 부랴트인은 고기국수로 수프를 대신하고, 플로프(고기와 채소, 쌀 등을 버터에 요리한 음식), 부랴트식 만두 포자(또는 ‘부우자’라고 불린다) 등을 주식으로 삼았다.

‘좋은 말은 망아지 때부터 알 수 있고 훌륭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알아볼 수 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말은 부랴트인의 삶에서 뗄 수 없는 가축이다. 그래서인지 부랴트인은 말고기를 음식에 즐겨 사용했다. 완자 ․ 만두 ․ 다진 고기요리 등에 말고기를 사용한다.

    

부랴트식 플로프 <출처: http://recepti-edi.ru>    

부랴트식 플로프는 잔칫상의 대표음식이다. 고기는 최대한 부드럽게, 쌀은 약간 바삭하게 알알이 씹힐 정도로, 고기, 쌀, 마늘과 양파, 버터 등의 재료가 서로 섞이지 않고 층층이 깔리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향신료를 넣어서 감칠맛과 매운 맛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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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트식 만두 ‘포자(부우자)’ <출처: http://ru-travel.livejournal.com>    

우유는 고기 다음으로 부랴트인의 주된 식재료이다. 우유, 버터, 스메타나(사워크림) 등은 항상 식탁에 놓여 있다. 전통 치즈인 ‘후루우드’(Хурууд), 우유 음료인 ‘쿠미스’와 ‘쿠룬가’, 응유 등 유제품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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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만든 치즈 ‘후루우드’ <출처: http://fanatbaikala.ru>            

건조한 응유 ‘아이르한’(Айрхан) <출처: http://fanatbaikal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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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에서 오물을 잡는 모습 <출처: gatchina3000.ru>            

불에 구운 오물 <출처: http://animalreader.ru>            

소금에 절여 말리고 있는 오물 <출처: siburbia.ru>            

인터넷 신문 <<러시아포커스>>에 따르면, 오물은 러시아에서 먹어봐야할 10대 음식 중 하나이다. 오물은 생물을 구워먹거나 소금에 절여 건조해서 먹거나 훈제해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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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넣어 끓인 녹차와 샨가 <출처: www.ljpoisk.ru>            

우유술 ‘타라순’ <출처: http://ru-travel.livejournal.com>            

부랴트인은 주로 녹차를 즐겨 마신다. 부랴트인에게 차를 마시는 것은 신성한 행위이다. 그래서 부랴트인만의 ‘다도()’가 있을 정도다. 녹차에는 우유를 넣어 마셨는데, 먼저 녹차 잎을 팔팔 끓여 쓴맛이 빠지면 우유를 넣어서 다시 끓였다. 차에 소금을 약간 넣어 마시기도 한다. 차와 함께 보통 ‘샨가’를 먹는다. 샨가는 주로 양 기름에 밀가루와 효모를 넣어 스메타나에 구워 만든다.

우유를 한 번 정제한 술이 타라순, 여러 번 걸러내면 독한 아르히가 된다. 특히 결혼식에 빠지지 않는 술이 타라순이다.

부랴트인의 중매 -허리띠를 바꿔서 사돈을 맺다    

부랴트인들은 전통적으로 족외혼을 고수했다. 같은 씨족 내에서는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정혼하는 관습이 있었고, 어떤 씨족에는 신부 납치 풍속도 있었다. 남자들이 허리띠를 바꿔 차면 사돈을 맺는다는 의미였다.

부랴트의 전통결혼절차는 사전합의, 중매예식 ‘하닥 타빌가(хадак табилга)’, 칼림(신부의 몸값) 지불하기, ‘바사가나이 나단’(처녀파티), 신부의 머리 땋기, 결혼여행, 시댁가기, 결혼식, 새 유르트를 정화하는 의식 등으로 이루어진다. 라마교가 들어온 이후에는 라마승이 결혼식 날짜, 신부를 데려오는 시간, 말의 색깔, 신부를 데려올 사람 등을 정해준다.

중매예식은 신랑 측 친척들로 구성된 중매인들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 친척들에게 신랑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중매인들은 보통 홀수(3/5/7명)로 구성되며 여자는 중매인이 될 수 없었다. 약혼녀 집 맞은편에는 말을 매지 않는다(요즘에도 자동차를 거기에 세우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내갈 때 사용하는 말을 그곳에 매놓기 때문이다. 신부 측에서는 이들의 방문을 전혀 몰랐던 척하는 것이 관례라 아무도 손님들을 마중하지 않는다. 중매인들은 태양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약혼녀의 집으로 들어간다. 중매자들은 집안의 제단에 정중히 인사하고 예물을 바친 후에 약혼녀 집안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결혼예식을 합의한다.

결혼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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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하는 처녀의 머리를 땋는 의식(‘호리 부랴트족의 결혼식’, C. S. 삼필로프, 수채화, 1943.) <출처: rubur.ru>    

먼저 신부 머리 땋기 의식을 한 후 신부를 데리고 신랑 측 마을로 결혼여행을 가는 것이 결혼식의 시작이다. 신랑 어머니는 으레 집 문턱에서 신혼부부를 맞이한다. 신랑신부는 미래의 행복을 빌며 태양을 따라 집을 세 번 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준비한 빵을 먹고 잔에 든 음료를 마신다. 손님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축사를 하고 축배를 든다. 그리고 금이나 곡물 등을 선물로 내놓는다. 물론 가장 비싸고 귀한 선물은 양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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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하닥(의례용 수건)과 잔으로 신랑신부를 맞이하는 신랑 측 어머니 <출처: lind.konior.ru>            

신랑 집에 도착해서 시어머니의 잔을 받는 신부 <출처: elhtly.com>            

가문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전통    

17~18세기 중반부터 가부장적 씨족체계의 성격이 부랴트인의 가정과 사회풍습에서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씨족 구분이 엄격히 유지되었는데 18세기 후반에는 부랴트인 씨족들이 80개에 달했다. 전통적으로 부랴트인은 다른 부랴트인을 만났을 때 먼저 어느 씨족인지를 묻는다. 보통 부랴트인은 부계 쪽으로 7~10대까지의 선조를 열거할 줄 알아야 했다.

가정과 결혼풍습에서는 모계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모계 쪽으로는 ‘나가사’(외삼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누이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의무와 권리를 가졌다.

후손의 존중 - ‘누구 어머니’, ‘누구 아버지’로 불리는 부랴트인    

‘아들은 낳아서 가문을 잇고, 딸은 낳아서 시집보내라’는 속담은 자녀들에 대한 부랴트인의 태도를 잘 드러내 준다. 다자녀는 행운으로 여겨졌다. 자녀를 많이 낳은 부모는 존경과 존중을 받았고 자녀가 없으면 천벌로 여겼다. 자녀가 없는 사람들에게 부랴트인은 ‘아궁이가 꺼졌다’고 말했다. 가장 끔찍한 저주는 ‘아궁이 불이 꺼져버려라!’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원래 이름이 아니라 아이 이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붙여서 불렸다. 아이 이름이 ‘바투’이면 ‘바투 아버지’나 ‘바투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지 6~7일째에는 ‘울게데 어룰하’(요람에 아이를 눕히는 의식)라는 가정의례를 통해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들이 모여서 신생아를 축하했다. 아이의 이름은 손님들 중 연장자가 지어 주었다.

장례와 추도식 - 샤머니즘과 라마교적 요소들의 공존    

    

                        올혼 섬의 고대 무덤 흔적(올혼 섬에는 5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섬 곳곳에는 여러 세기의 건축물, 벽화, 고도()와 무덤 흔적들이 존재한다.) <출처: http://shuwany.ru>    

부랴트인들의 매장형식과 장례 풍습은 부족마다 달랐다. 고대에는 고인의 가까운 친척들이나 남성들만이 고인의 장례를 치렀다. 여성들이나 다른 부족의 대표자들은 장례에 참여하지 못했다. 부랴트인들은 고인의 나이, 죽음의 원인,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저지대나 언덕 등에 묘지를 쓰기도 하고, 고인을 숲 어딘가에 놓거나, 때로는 나무나 가지, 돌 등으로 덮어놓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몇몇 지역에서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S. G. 잠발로바(Жамбалова)는 “올혼 섬과 그 주변에 사는 현대 부랴트인들에게는 고인의 나이에 따라 몇 가지의 장례 방법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고인이 젊으면(20-50대) 시신을 땅에 묻는다. 신생아가 죽으면, 시신은 대지 위에 놓아둔다. 50세 이상 장수했을 경우에는 화장을 한다. 잠발로바에 따르면 이 지역의 부랴트인들은 화장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땅에 묻힌 사람은 흙이 무겁고 태양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반면 화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몇몇 부랴트 종족들은 관과 무덤에 곡식알갱이를 흩뿌렸다. 곡식 알갱이는 정화와 환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마교와 러시아정교가 들어오면서 장례 의식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K. M. 게라시모바(Герасимова)에 따르면, 부랴트인의 장례풍속은 ‘라마교’와 ‘샤머니즘’적 성격들이 맞물려 있다. 장례의식의 라마교적 특징은 고인의 육체와 영혼을 속세의 부정()으로부터 벗어나 최종목표로서의 열반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상징행위들을 말한다. 샤마니즘적 측면은 고인을 산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켜 저 세상으로 보내 고인의 영혼이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려는 의례 행위들로 나타난다.

라마교가 보급되면서 바이칼 지역 부랴트인들의 장례식은 라마승이 경전에 의거하여 고인의 매장 날짜, 시간, 방법을 결정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고인의 생년월일시와 죽은 날짜와 시간, 사회적 지위와 죽음의 성격 등을 고려하여 매장 날짜와 방법을 정했다. 죽은 사람의 몸을 천으로 감싸고 얼굴은 하닥(의례용 수건)으로 덮었다. 마치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을 띠도록 무릎을 굽히고 오른손을 귀 쪽에 갖다 대었다. 고인의 머리는 떠오르는 태양빛이 눈을 비추게 서쪽에 놓았다. 묘는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파서 매장했으며 49재를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기도서를 읽는다거나 불을 밝혀두는 등 경건하게 생활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 여러 가지 선행을 하며 보냈다.

부랴트인들은 러시아와 접촉하면서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고인을 땅 속 깊이 매장하고, 3일, 9일, 40일에 추도식을 하기도 한다.

부랴트인 – 우리와 너무나 비슷한 사람들    

    

                        부랴트 씨름 <출처: www.photoxpress.ru>    

씨름을 즐기는 민족은 많다. 러시아씨름, 일본씨름 등이 유명하다. 우리에게도 씨름은 익숙한 놀이이다. 그러나 씨름에서 샅바를 사용하는 민족은 우리와 부랴트인 뿐이다. 어디 그뿐이랴. 앞서 언급했듯이, 부랴트인은 ‘바투 아버지, 바투 어머니’라고 불린다. 마치 우리가 ‘길동이 엄마, 길동이 아빠’라고 부르듯이. 우리네 어린아이의 엉덩이에는 푸르스름한 몽고반점이 자리한다. 부랴트인의 아이들에게서도 역시 몽고반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외모도 우리와 가장 비슷하다.

신체적 특징, 사회문화적 관습, 그리고 놀이문화뿐만 아니라 정신문화도 유사하다. 수많은 설화들의 상호비교연구를 통해 확인되고 있는 이야기구조와 주제의식의 일치는 이에 대한 좋은 증거이다. 거기에는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찾았던 신화의 원류가 흐른다. 부랴트인들은 바이칼의 푸른 물결처럼 지금도 유목민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영원한 노마드’로 얼마나 더 살아갈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참고문헌 정리
·극동 시베리아 개황, 2011. 4. 외교부
·바이칼 호, 네이버 지식백과.
·『바이칼의 게세르 신화』, 일리야 N, 마다손, 양민종 옮김, 솔출판사, 서울, 2008.
    ·『북아시아설화집』, 제 1권. 부랴트족, 김은희 역. 이담북스, 경기도, 2015.
    ·Волков С. Н. Вокруг Байкала: Мини-энциклопедия: Путеводитель. Иркутск, 2001.
    ·Дочь Байкала Ангара и богатырь Енисей, Информационный портал Байкал-Lake
    ·Рязановский В.А. Монгольское право (преимущественно обычное). Исторический очерк, Харбин, Типогр. H. Е. Чинарева,1931.
    ·Хороших П. П. По пещерам Прибайкалья. — Иркутск: Иркутское книж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1955.
    ·www.ljpoisk.ru
    ·http://khamagmongol.com
    ·http://olkhon-myst.ru
    ·http://shuwany.ru
    ·http://terms.naver.com. 부랴트인과의 식사, 네이버 지식백과.
·http://www.toonto.ru
    ·http://russiafocus.co.kr/travel/
    ·http://ru-travel.livejournal.com
    ·https://ru.wikipedia.org

김은희 이미지         
김은희 |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초빙연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서로는 『현대러시아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제 1권, 제 2권), 『겨울 떡갈나무』, 『금발의 장모』, 『나기빈 단편집』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나는 현대 러시아작가다』(공저) 등이 있다.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원형스토리를 발굴,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러시아 문화와 문학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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