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허위론’ 교과서에 그대로
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기록 허위론’ 교과서에 그대로 |
한겨레 2009.06.17
6차 교육과정의 구 국사교과서의 부록, ‘역대왕조계보’. 신라는 내물왕(재위 356~402)부터 재위연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신라가 사실상 건국되었다는 의미이다. 무려 400년 이상의 신라사가 부인되고 있는 것이다.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⑥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나?
한국 사학계 주류의 정설(定說) 중의 하나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삼국의 시조가 누락되어 있는 것도 이런 사관의 반영이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국사교과서>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하고 있었다.“임나일본부 얘기 없어 조작 사료”
조선사편수회 쓰다 소우키치 주장에
부정확한 ‘동이열전’ 그대로 수용
주류학계, 교과서에서 삼국시조 빼
<삼국사기>는 신라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57년,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믿겠다는 것이었다. 7차 교과과정의 <국사교과서> 부터는 그 이전 왕들의 재위연대도 수록했지만 주류 사학계가 자신들의 고대사 인식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넣은 결과가 아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육부 관료들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강력히 요구한 결과 마지못해 수용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초기 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채 인쇄했던 일부 <국사교과서>를 폐기 처분하는 소동까지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교육부 관료들보다 저차원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동을 거쳐 현행 <국사교과서>의 부록에는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가 들어갔지만 본문 서술에서는 여전히 초기 국왕들의 존재가 부인된다.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때 사실상 건국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고고관에는 ‘원삼국실(原三國室)’이란 전시실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삼국시대에 대해 “서력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300년경까지 약 3세기간을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삼국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부락(部落)단위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면 삼국의 유물이라고 하지 않고 원삼국이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고고학판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원삼국실로서 아비(삼국)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했던 일제시대가 계속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심지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용한 논문은 통과되지 않는 것이 학계의 상식일 정도로 사학계 주류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도그마가 되었다.
삼국사기, 편년체라 조작 어려워
가야의 ‘말머리 가리개’.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
소위 원삼국 시기의 철제무기. 철제 무기의 출현은 고대국가 성립의 지표로 해석하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의 통설이지만 한국에서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신라와 백제는 부락수준에 불과했다면서 굳이 원삼국이란 틀에 가두어 설명하고 있다. |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이라고 생각한다. 쓰다 소키치의 말 중에 핵심은 ‘(<삼국사기>의) 왜에 관한 사료 역시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그가 같은 글에서 “(<삼국사기>에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일본)가 가야를 근거로 신라에 당도했다’라는 명백한 사건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쓴 것처럼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왜가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해야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조선역사지리>에서 “(한반도) 남쪽의 그 일각(一角)에 지위를 점유하고 있던 것은 우리나라(倭國)였다. 변진(弁辰)의 한 나라인 가나(加羅:가야)는 우리 보호국이었고, 임나일본부가 그 땅에 설치되어 있었다”라고 쓴 것처럼 쓰다의 관심은 임나일본부였다. 그래서 쓰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上代)에 보이는 외국관계나 영토에 관한 기사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라고 비판했다. 임나일본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외국관계나 영토’ 관계 기사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논리 중에는 “혁거세의 건국을 갑자년(甲子年 BC 57)으로 한 것은 간지(干支)의 시작을 맞춰놓은 것”이므로 가짜라는 주장까지 있다. 신라가 갑자년에 건국되었다고 쓴 것이 조작의 증거라는 뜻이니 굳이 반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열한 수준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하는 일관된 이유는 단 하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나오지 않을 뿐더러 <삼국사기> 기록처럼 한반도 중남에 강력한 고대국가인 신라와 백제가 존재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기에 <삼국사기>를 부정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부정해야 했던 쓰다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 진수(陳壽)의 <삼국지> 동이열전 한(韓)조였다. <삼국지> 한(韓)조는 ‘마한은 54개 소국,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도합 78개 소국이 있다’고 <삼국사기>와는 달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수는 이 글에서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고 썼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에 따라서 삼한의 위치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는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으며 삼한도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했다. 한반도 남부가 78개 소국으로 나뉘어 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말살한 자리를 <삼국지> 한조로 대치시켰던 것이다. 쓰다는 “한지(韓地:한반도)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삼국지> ‘위지’의 한(韓)전과 그것에 인용된 위략(魏略)이 최초의 것으로서 그것에 의하면 3세기의 상태가 알려졌다”라고 <삼국지>가 중국 3세기 삼국시대(220~265)에 대한 기술이니 그 한(韓)조도 당연히 3세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3세기 한반도 중남부에는 강력한 고대 국가 신라·백제가 아니라 78개 부락(部落) 단위의 소국이 우글대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은 예(濊)나라를 설명하면서 ‘지금(今)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서기 3세기가 아니라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인 서기전 2세기 이전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이다. 물론 3세기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도 있다. 이처럼 <삼국지> 동이열전은 진수가 부정확한 전문에 의거했거나 정리되지 않은 사료를 가지고 쓴 부정확한 기록에 불과하다. 해방 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국사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빼버렸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되살려야하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계속 부정하면서 <삼국지> 동이열전을 경전으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현행 <국사교과서>의 ‘여러 나라의 성장’ 부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 순서로 기술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누락시켰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의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濊), 한(韓:삼한)’과 같은 순서의 기술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지> 동이열전을 빌미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한 식민사관이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해방된 지 한 갑자가 훨씬 지났지만 대한민국에서 조선사편수회는 과연 해체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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