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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자 훈민정음 (2)] 세종대왕 단독작품

한스타일 | 2015.07.23 16:13 | 조회 1359 | 추천 0

민족문자 훈민정음 (2)] 세종대왕 단독작품


 2014.11.14  글/ 반재원(국학박사, 훈민정음연구소장, 한국땅이름학회장)



훈민정음의 창제 이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목요연하게 기술되어 있음을 볼 때 연구를 거듭할수록 한 개인이 일관성 있게 추진한 단독 작품임을 느끼게 한다. 세종 때 만든 해시계를 비롯한 30여종의 발명품에는 하나같이 그것을 제작한 실무자의 이름과 연유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훈민정음만 유일하게 실무자의 이름이 없이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 전자 모방이란 단군때의 ‘가림토’ 


세종이 눈병이 나서 청주의 냉천으로 요양을 떠나면서도 훈민정음 자료를 한보따리 챙겨 떠난 사실을 보더라도 얼마나 한글 창제에 몰두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물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애착이다. 책이나 논문을 써본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바로 <세종실록> 103권과 <훈민정음 해례본> 61쪽의 정인지 서문에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자방고전字倣古篆)’라는 문구 때문이다. 그동안 ‘고전’을 한자의 옛 서체나 범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필자는 여기에 나오는 ‘전문(篆文)’이나 ‘고전(古篆)’이나 최만리가 말한 ‘전자(篆字)’가 모두 단군 때의 ‘가림토’를 일컫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토착(吐着)’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 유사에 “세종이 방언이 문자와 서로 통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여러 대군에게 풀어보게 하였으나 아무도 풀지 못하였다. 그래서 출가한 정의공주에게 보냈는데 곧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칭찬하고 큰 상을 내렸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변음’과 ‘토착’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변음은 정음과 반대되는 말로 사투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토착은 무엇일까? 그 당시 대군들은 아무도 ‘토착’을 풀지 못하였는데 오직 공주만 홀로 풀어 바쳤다는 내용으로 보아 ‘단군 때의 가림토’가 그때까지 여인네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착(吐着)의 ‘토(吐)’는 분명 가림토(加臨吐)의 ‘토(吐)’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공주로부터 가림토의 이치를 응용하였기 때문에 토착 즉 ‘가림토’를 ‘전자(篆字)’로 보아 해례본에도 옛 전자를 모방했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꼴 외의 창제원리는 세종의 독창 



단군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3세 가륵 단군 때 삼랑 을보륵이 만들었다는 가림토문을 보면 훈민정음 중성의 11자가 다 들어있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에는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 없이 자연에서 이루었다(무소조술無所祖述 성어자연成於自然)’라고 했는데 이 내용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앞의 ‘자방고전’의 뜻과 서로 배치되는 말이다. 


이에 필자는 앞의 ‘자방고전’이라는 뜻은 글자의 꼴을 가림토문에서 많이 취한 것이라는 의미로 보며 ‘무소조술 성어자연’이라는 문구는 글자의 모양 이외에 한글의 천 인 지의 원리, 초 중 종성의 조합방법, 발성기관을 형상화한 것, 글자의 가획방법, 그리고 동양천문도의 28별자리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만든 것 등은 모두 세종의 독창적인 이론이라는 뜻으로 풀어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자방고전’이라는 문구 하나로 인하여 세종의 창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자방고전’이라는 말은 글자꼴은 가림토의 맥을 이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말이며 ‘무소조술 성어자연’이라는 말은 글자꼴외의 창제원리는 모두 세종의 독창적인 연구물이었다고 풀이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창제원리 전체를 들여다보면 서로 혼란을 일으킬 문구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도 훈민정음 전체내용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하나의 문구만 해석하여 주장하다보니 일반인들에게 자꾸 혼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옛 전자가 불비하여 새로 만드셨다 


여기서 다시 고전(古篆)이라는 단어에 눈을 돌려보자.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 중 정인지 서문에서 <象形而字倣古篆>이라 하여 글자의 형상이 옛 전자를 본떴다고 한 구절이 있다. 또 세종실록 25년 12월 조에(12월 30일) <是月上親製諺文 二十八字其字倣古篆>이라 하여 이 달에 상께서 친히 언문28자를 제작하였는데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라 하여 언문을 모두 옛 글자에 근본 하였으며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고 하였고, 세종 26년 2월 20일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라 하여 글자의 형태가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고 글자가 합해져서 소리를 낸다고 하지만 모두 옛것과 반대라고 하였다. 

신경준은 그의 『언서운해』에서 “동방에 옛적에 통속으로 사용하던 문자가 있었으나 그 수가 불비하고 그 형태가 무법하여 제대로 말이 못되어 일반적으로 쓰이지 못하였는데 우리 세종 임금께서 훈민정음은 만드셨도다”1)라고 했다. 

또 단기고사에는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지었다고 했으며 황해도 백악 마한촌에 국문 정음 비문이 있다고 하였다. 


‘가림토’는 원래 산수가림다(珊修加臨多)라고 하였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산수가림다(珊修加臨多)로 나오고『심딩전서』의「단서대강」에는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로 기록되어 있다.2) 


<조선상고사>에는 산호산, 패옥소리산(珊)이며 <단서대강>에는 깎을산, 정리할산(刪)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산수(刪修)’란 ‘불필요한 자구를 정리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산수가림다’가 여진족발음으로 ‘산수그리토’로, 그것이 인도로 건너가면서 ‘산스크리트’가 된 것으로 유추해 보는 것이다. 즉 산스크리트어도 가림토문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가림토문도 또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시 때의 ‘산목(算木)’, 치우 때의 ‘투전목(鬪佃目)’, 부여의 ‘서산(書算)’, ‘우서(雨書)’, ‘용서(龍書)’, ‘녹도문(鹿圖文)’ 등의 글자를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한다. 


최만리의 반대상소는 집현전이 참여않았다는 반증 


또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집현전학사들의 창제설도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신숙주가 귀양 와 있는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러 요동을 왕복한 것도 그 당시의 국제 공용어인 한자발음을 정확히 알기 위한 목적이었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자문을 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숙주가 황찬을 처음 만난 것은 훈민정음이 다 만들어진 세종 25년인 1443년 겨울(癸亥冬)보다 1년 2개월 후인 1445년 1월 세종 27년이었기 때문이다. 또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로 들어온 시기가 그가 25세 때인 세종 23년(1441년)이었고 세종 25년(1443년) 2월에 27세의 나이로 일본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곧바로 8개월 동안 일본을 다녀오는 일 등으로 하여 그 시기에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성삼문의 나이도 그때 아직 26세의 청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아 이미 만들어진 한글로 언문 서적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던 것일 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동국정운을 편찬할 때 세종이 일일이 신숙주의 번역 내용을 꼼꼼히 검토한 후 통과가 되어야 다음 내용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최만리가 그 당시 집현전의 두 번째 서열인 부제학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집현전학사들과 집단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은 집현전학사들이 한글창제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같이 만들었다면 집현전의 부제학이라는 지위에 있던 사람이 뚱딴지 같이 상소를 올릴 이유가 없다. 또 성현의 용재총화에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만들게 하였다”라는 내용 또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성현은 세종 21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그가 4살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기 때문에 창제과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언문청도 훈민정음을 만든 후 글자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지 훈민정음 창제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었다. 


세종 25년 이전까지의 어떤 기록에도 집현전의 협력을 얻었다는 기록이 없다. 최만리가 “언문이 조금도 이익 됨이 없는데 세자가 이일에 정신을 쏟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이는 시급히 닦아야할 학문에 손해가 심하다.” 라고 불평한 내용으로 보아 아들 문종과 딸 정의공주 등을 조교로 삼아 세종 홀로 창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계속) 


1) 신경준 - 신숙주 막내 동생인 申末舟의 후손임. 조선 중기의 문신. 실학자. 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초석 

을 놓았다. (1712-1781년. 숙종 38년-정조 5년) ‘ 東方 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趨以形一方不言 而備一方用也 - 

我世宗大王 御製訓民正音’ 

2) 이준『, 心堂全書 』단서대강 제 3편. 환성사, 1981. 144쪽.6) KBS, 1996년, 10월 9일.

3『) 한단고기』 17쪽, 단군세기. 고동영 역주『, 단기고사』,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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