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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어제 훈민정음

한스타일 | 2015.07.23 16:12 | 조회 1042 | 추천 0

<역사산책>세종어제 훈민정음

이형모 발행인  2014.10.23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로 지정된 ‘가갸날’이 그 시초이며 1928년 ‘한글날’로 개칭되었다. 광복 후 10월 9일로 확정되었으며 2006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정인지가 서문을 쓴 날자가 ‘정통 11년 9월 상한’으로 기록되어 있어 9월 상순의 끝 날인 음력 9월 10일로 잡고 그것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로 정한 것이다.


세종실록 제102권 세종25년(1443년) 음력 12월 30일 그믐조 “이 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을 모방하였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이른다.” 창제 작업은 6년 동안 어느 누구의 조력도 받지 못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으며 훈민정음이 완성되자 세밑에 전격적으로 공표했다.


1443년 12월에 창제한 것을 공개하고 3년 동안 여론을 수렴하는 기간을 거쳐 1446년 9월 상한에 이르러서야 ‘반포’하여 공식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1444년 2월 20일에 최만리 등 7인의 집현전 학사가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상소 파동의 전말을 ‘박영규 저;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에서 옮긴다.


“상소 내용은 첫째, 새로운 문자 창제 소식을 중국이 알게 되면 비난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옛 글자와 반대 된다. 둘째,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다. 셋째, 설총의 이두가 있는데 굳이 언문을 만들 이유가 없다. 넷째, 말과 글이 같아도 어리석은 백성의 원통함을 푸는 데는 도움이 안된다. 다섯째, 문자의 보급은 국가의 대사인데 어째서 조정 대신들과 충분한 협의도 거치지 않고 임금이 독단으로 결정하여 시행하느냐? 여섯째, 왕이 외곬으로 정책을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격노한 세종대왕의 반론은,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고 했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말해 보라.” 훈민정음 창제를 위하여 일찍이 중국과 일본의 운서를 모두 구해서 섭렵한 세종대왕 앞에서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7인의 무리 중에서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해서 백성을 가르쳐도 소용없다’고 주장한 정창손은 파직시키고,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이 없다고 했다가 불가하다고 말을 바꾼 죄’로 김문은 장 100대에 징역 3년형에 처해졌다. 이것으로 집현전 학사들의 반발은 끝났다. “세종의 강력한 추진의사와 학문적 논리, 그리고 언어학자로서의 권위 앞에 최만리 등이 굴복한 셈이다.”


정인지 훈민정음 해례 서문(세종 28년 1446년 반포 당시), “계해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예의를 들어 보이시고 훈민정음이라 하셨는데 상형하여 만들되 글자는 고전(옛 글자)에서 모방한 것이다.”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되어 창제원리와 사용법에 대해서는 궁금함이 없어졌다. 그러나 어떤 옛 글자를 모방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다양하다. 어떤 설명을 택해야 하나?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10월 3일, 전년에 수문하시중으로 은퇴한 ‘이암’은 ‘단군세기’를 집필하고 이듬해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이암의 4남 이강의 외아들인 ‘이원’은 태종 치세에 우의정으로 세자의 스승이 되고, 세종 즉위 다음날 다시 우의정으로 제수되고 그 다음날 세종은 이원을 보내어 종묘에 ‘즉위신고’를 한다.


그런데 이암의 ‘단군세기’에는 ‘3세 단군 가륵 때에 경자 2년(BC2181년)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하고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림토와 훈민정음의 자모를 비교하면, 훈민정음의 28자모는 가림토 38자모에서 ‘ㄷ,ㅌ’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같은 모양이다. ‘옛 글자’는 가림토인 것이다.


세종 7년에 ‘세종대왕은 평양에 단군사당을 짓게 했다.’ 유교국가의 임금인 세종에게 ‘단군왕검이 국조’라는 확신이 생긴 경위는 무엇일까? 조부 ‘이암’이 집필한 ‘단군세기’를 우의정 이원이 임금에게 바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가림토’를 보고 훈민정음 연구에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옛 글자를 모방했는데 왜 ‘훈민정음 창제’라고 할까? 훈민정음보다 3627년 앞서서 만들어진 ‘가림토정음’은 글자는 남았으나 그 음가는 아는 사람이 없다. ‘발음기관이 움직이는 모양을 연구하여’ 정음 28자의 자체를 선택하고 음가를 부여한 것은 세종대왕이고 그래서 ‘새로운 문자의 창제’인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이후 “정음청을 설치하여 일반관리는 의무적으로 훈민정음을 배우게 하는 한편 관리시험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고, 일반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토록 했다. 또한 형률 적용과정에서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알려주도록 했으며, 궁중의 모든 여인들에게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임금 자신은 조정 대신들과 육조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은 순식간에 민간으로 퍼져나갔고, 학자는 물론이고 반가의 여자들과 평민, 심지어 노비들까지 쉽게 접하고 익힐 수 있었다. 덕분에 모든 백성이 문자의 혜택을 누리는, 그야말로 세계 언어학사에 일획을 긋는 혁명적인 사건이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국조 단군께서 반만년 전에 뿌린 씨앗 ‘민본’에 세종대왕께서 풍성한 물줄기를 댔다. 그리고 21세기 한인들의 문화융성을 위하여 세종대왕께서 큰 초석을 놓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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